Essay

Theology/Philosophy

세상의 질서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

Fragment 1

'Fragments' 게시판 오류로 현재 버그 수정 중. 게시판 완성 시 옮겨지게 될 글임.

제시문 1
칸트는 정신이 그것의 인식 방법을 그 대상에 부과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한다. 정신은 바로 그러한 본성에 의해 우리의 경험을 능동적으로 조직한다. 즉 사유 작용은 우리의 감각을 통한 인상의 수용 행위는 물론 우리가 경험한 것에 관한 판단 행위도 포함한다. (중략) 모든 인간은 사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불가피하게 정신의 생득적인 구조에 따라 사물에 관해 사유한다. (중략) 정신의 독특한 활동은 우리의 경험을 종합하고 통일하는 것이다. 정신은 이 종합을 우선 <감각 가능한 잡다(雑多)> 속에 있는 여러 경험에 직관의 형식 Anschaungsformen, 즉 공간과 시간을 부과함으로써 이뤄진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사물을 <공간>과 <시간> 속의 존재로 지각한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은 우리들이 경험하는 사물들로부터 도출된 관념들도 개념들도 아니다. 공간과 시간은 직관 속에서 즉각적으로 만나며 동시에 선천적이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그것들은 우리가 항상 경험적 대상을 볼 때 눈에 쓰는 렌즈들이다. 우리가 사물을 감각하는 방식을 취급하는 공간과 시간 이외에도 어떤 사유의 범주 Kategorie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정신이 우리의 경험을 통일하거나 종합하는 방식을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고있다. 정신은 우리가 감각 세계를 해석하는 행위에 종사할 때 여러 종류의 판단을 행함으로써 이 통일 행위를 이룩한다. 경험의 잡다는 <분량 Quantität>, <성질 Qualität>, <관계 Relation>, <양상 Modalität>과 같은 어떤 고정된 형식이나 개념을 통해 우리에 의해 판단된다. (…) 이러한 모든 사유 양식들은 종합의 행위를 구성하는 것들인데, 이러한 행위를 통해 정신은 감각 인상들의 잡다로부터 하나의 일관성 있는 단일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제시문 2
소크라테스: 자 그러면 이 점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봅시다. 당신이 “배워서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이 가리키는 무엇인가가 있지요?
고르기아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확신하고 있다”는 어떻습니까?
고르기아스: 마찬가지지요.
소크라테스: 그러면 “배워서 알고 있다”와 “확신하고 있다”, 즉 “앎”과 “확신”이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어떤 점에서는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르기아스: 나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옳은 생각입니다. 그 차이는 이렇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고르기아스, 거짓된 어떤 확신과 참된 어떤 확신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제가 생각하기에 당신은 “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고르기아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어떻습니까? 거짓된 앎과 참된 앎이 있습니까?
고르기아스: 없지요.
소크라테스: 따라서 분명히 그것들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고르기아스: 맞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렇지만 배워서 알고 있는 자들과 확신하고 있는 자들은 설득된 자들이기도 합니다.
고르기아스: 그건 그렇지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우리가 설득의 종류를 둘로 놓아도 될까요? 하나는 앎 없는 확신을 가져다주는 설득이고, 다른 하나는 앎을 가져다 주는 설득으로.
고르기아스: 물론이오.

존 레녹스는 인간이 구성한 세계의 배후에는 종교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자연에 일정한 법칙성이 있음을 예상하고 과학이라는 학문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유대-기독교 전통 속 절대 정신으로서의 신이 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했다는 믿음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주장하는 ‘종교’는—일반적으로 종교적 신앙의 근원이라고 생각되곤 하는—감정적 믿음이 아닌 근거를 통한 이성적 정당화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다른 토론자들이 묘사하는 종교의 개념과 다소 구분되는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어 조던 피터슨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몸에 새겨진 종교적 본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원형’으로서의 종교적 행동 패턴들로 인해 인간은 자연스럽게 믿음의 한 형태로서의 종교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했고,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라는 밈 복합체의 중요한 성분 중 하나로 “이성적인 물음을 꺾어 버리는 단순한 무의식적 수단”인 “믿음”, “맹신”을 든다. (도킨스, 344) 마이클 루스도 레녹스와의 토론에서 “저는 신을 믿기 때문에 설계를 믿습니다. 설계를 믿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말을 인용하며 종교적 신앙은 증거를 통한 이성적 설득이 아닌 믿음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반면 레녹스는 자신에게 종교적 신앙이란 막연한 믿음이 아닌 “지식인이자 과학자로서 근거에 기초한 헌신”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언급한 종교적 신앙의 근거들이 사실 그의 신앙을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종교적 신앙은 이성이 아닌 믿음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레녹스가 제시하는 종교적 신앙의 근거들은 그 자체로 합당한 근거라고 볼 수 없다. 레녹스가 제시하는 근거들과 그의 종교적 신앙 사이에는 논리적인 비약이 있기 때문에 그의 신앙을 제대로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시를 통해 이 주장을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그 자신도 수학자인 레녹스는 두 개의 논의 수준을 상정한다. 첫 번째 수준은 “과학의 실증적인 측면” 즉 과학이 일반적으로 다루는 것들과 관계하는 수준으로 피스톤의 작동 원리, 수학적 정리 등에 대한 담론이 여기에 속한다. 한편 두 번째 수준은 메타-과학으로 ‘과학이 왜 가능한가’, ‘이 세상에 질서가 왜 존재할까’에 대한 담론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레녹스는 사도 바울이 ‘신의 존재와 그의 힘은 피조물을 통해 인식된다’고 했던 바를 인용하여 바로 이 두 번째 수준의 메타-과학적인 질문을 통해 세계를 관장하는 초월적 존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모든 피조물은 질서에 소속되어 있다’는—최소한 레녹스가 말한 바에 따르면—자연에 대한 하나의 “사실”은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될 수 있고, 이러한 증명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신에 대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는 주장인 것이다. 하지만 이 논증 속 근거와 결론 사이에는 해소되어야 할 논리적 비약이 존재한다. 바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현상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진술은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진술이 될 수 없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정상적인 안경을 쓰고 온통 초록색으로 칠해진 방 속에 있는 갑과 초록 색안경을 쓰고 다양한 색깔의 가구가 배치된 일반적인 방을 둘러보고 있는 을 두 명의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두 명이 각자 경험하는 대상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는 이 방은 도대체 왜 온통 초록색뿐인 걸까?”라는 공통된 질문을 던질 것이다. 레녹스가 던지는 “내가 보는 이 세계는 도대체 왜 질서가 잡혀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갑의 경우에 해당되는지 을에 경우에 해당되는지에 대해 우리는 확답을 내릴 수 없는 만큼 어느 쪽의 여지도 열어둘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레녹스의 근거가 그의 주장을 지지하지 못한다는 점을 완전히 증명하기 위해서는 위의 예시에서 언급된 을과 같은 상황이 인간이 자연을 관찰하는 데에 있어서도 적용 가능한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제시문 1 속 칸트의 주장을 참고할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감각적 자극의 임의적 총체로 다가오는 세계를 일관적으로 질서 있게 설명해내고자 하는 정신 작용을 통해 감각된 세계를 재구성한다. 다시 말해 직관의 형식과 범주라는 정신의 선험적, 선천적 구조를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세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고 오직 이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녹스를 비롯해 자연의 규칙성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느끼는 모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관찰한 질서가 자연 자체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질서와 일관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정신 작용이 자연에 투영된 것은 아닌지, 자연에 질서를 심은 신에 대한 숭배가 사실은 자신의 정신에 대한 나르시시스트적 경탄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레녹스는 종교적 신앙을 지지하기 위해 예수가 물을 와인으로 바꾼 사건, 폴이 예수의 물리적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그의 가르침에 설득된 사건 등 성경으로부터 몇 가지의 근거들을 인용하여 제시하지만, 이 근거들은 애초에 성경이라는 종교 경전에 대한 잘못된 접근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현재 우리와 시공간적으로 크게 괴리된 집필 배경을 가지고 있는 종교 경전은 당시의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역사 비평을 통해 해석되어야 한다. 문자 그대로의 내용을 읽음으로써 경전을 이해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할 뿐 아니라 경전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왜곡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된다.

둘째, 종교적 신앙은 믿음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에 근거를 통해 정당화되는 지식과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토론에서 레녹스는 자신의 종교적 신앙이 근거에 바탕을 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라는 근거에 의해 설득[되며]” 기독교가 시작하게 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앞서 첫 번째 논지에서 증명했듯 여기서의 ‘근거’는 잘못된 성서 접근법으로 인해 애초에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없을 뿐더러 타당한 근거라고 가정하더라도 종교적 신앙은 과학적 지식과 달리 근거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이 간과되고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 ‘고르기아스’에서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설득에는 배움을 통해 앎을 얻게 되는 설득과 확신을 가져다주는 설득 두 종류가 있음을 주장한다. 여기서 앎의 경우에는, 모든 경험적인 근거가 앎을 연역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만큼 진위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진자 운동 등 다양한 경험적 실험을 통해 우리는 갈릴레오의 법칙을 확인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확신은 경험적 근거로부터 비롯될 수는 있지만 경험적 근거에 의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근거와 확신은 근거와 앎의 경우와 달리 논리적인 필연성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같은 경험적 근거를 보더라도 사람들이 각자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제시문 2에서 언급되었듯 거짓된 확신과 참된 확신이 생기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두 명의 학자가 마주보고 앉아 성경에 적힌 글귀에 대해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지고 토론하고 있는 상황 자체도 레녹스의 주장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있다. 즉, 우리는 제시문 2의 진위 가능성을 통한 앎과 확신의 구분을 통해 종교적 신앙이란 과학적 지식과 같은 앎이 아닌 믿음을 통해 정당화되는 확신에 해당한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Works Cited

플라톤, '고르기아스'. 김인곤 역. 이제이북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