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Aesthetics

그리스 비극 속 중용(DRAFT)

개인적으로 작성하고 있는 글로 아직 미완성 상태임.

비극의 주인공들은 정말 멜랑콜리커일까?-‘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나타나는 오이디푸스의 정서 양상을 분석

해결해야 할 질문들: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에 등장하는 신들은 다른 신화들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과 사뭇 다름. 후자는 “불사한다는 점만을 제외한다면 여러 의견을 가지고 다투기도 하고 서로 질투하기도 하는 인간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왜?
오히려 이것은 각자의 주체성을 증명해주는 특성이다. 내가 말했던 신은 하늘에 있는 단 한 명의 유일신이 아닌, 신을 각 인간 속으로 끌어오려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들이 많은 모습을 가지게 된 거고 신들이 인간의 모습을 닮게 된 거다; 각자의 타자가 말하는 대로!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는 모습도 각자가 각자의 몸의 목소리를 듣고 내린 결정.

  1. 문제 의식
  2. 비극 작품에서 제시되는 인간의 면모 2가지
    1. '의식적 나'
      1. 일상 속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긍정할 수 있는 내면의 한 부분
    2. '타자적 나'
      1. 일상 속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그러나 불현듯 또는 어떤 특정한 계기로 무의식적 충동으로써 ‘의식적 나’를 덮쳐 오는 내면 속 미지의 세계
      2. 이때의 무의식적 충동은 중간 보고서에서 언급했듯 필연적 당위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광기, 사랑의 형태로 ‘의식적 나’에게 다가온다. <이러한 ‘타자적 나’의 특징은 비극 속에서 사실로서 제시되는 미래와 당위가 동일시되는 현상, 미래에 대한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는 현상 등을 가능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3. 하지만 ‘의식적 나’와 ‘타자적 나’는 서로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하는, 인간을 구성하는 필수불가결한 두 요소이다. ‘의식적 나’가 ‘타자적 나’를 배제한 채 비대해지는 경우에는 크레온이 보였던 오만을 관찰할 수 있고, 반대로 ‘타자적 나’가 절제 없이 자아를 잠식하는 경우에는 아이스킬로스 ‘자비로운 여신들’의 에리니에스 여신들을 휘감았던 어둡고 잔인한 광기만이 남게 된다. 비극 속 등장인물들은 각각 크레온과 에리니에스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좌표를 찍을 수 있고, 수직선의 정중앙에서 우리는 이 두 면모를 가장 잘 조화시킨 이상적인 인간상을 찾아볼 여지가 생간다. 그리고 이 정중앙의 인간상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여러 아이스킬로스 작품들에 걸쳐 중요한 가치로 강조된 “중용”, “정도(正道)를 지킴”, “절제”로서의 “분별” 개념을 참고해볼 수 있다. 즉, ‘의식적 나’와 ‘타자적 나’의 조화를 이루어낸 인간상을 ‘분별하는 자’로, 그렇지 못한 인물들은 ‘분별없는 자’로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비극 작품에서 제시되는 인간상 2가지
    1. 중용, 정도(正道), 절제로서의 “분별”의 의미
      1. [171pg 자비로운 여신들] 코: “절도 없는 생활이나/압제하의 생활도/바람직하지 못하나니,/신은 무엇보다도 중용에/승리를 주었으나, 각각/그 형편에 따라 다르다./내가 말하는 것은 정도에 알맞는 것./무릇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은/진실로 교만에서 생기는 것,/건전한 분별로부터 모든 사람이/구하는 바람직한 행복이 온다.//그러니 무엇보다도,/정의를 모신 신전을 공경하라.”
      2. [65pg 아가멤논] 코: “어차피 용서치 못할 음모가 낳은 화근/파멸이 이윽고 그 모습을 뚜렷히 나타내리. 아무리 그 기세가 맹렬할지라도/또 집안이 번성하고 재물이 넘칠지라도/가장 알맞는 것은 정도를 넘지 않는 일/분별심이 충분히 갖추어진 인간은/모든 게 충분할 만큼 곤궁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부나 재물이라도/교만한 자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정의로운 신의 제단을 업신여기고/결국 멸망을 불러일으키는 자에게는.”
      3. [77pg 아가멤논] 코: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경스러운 일이야말로/뒷날 더욱 꼬리를 달아 자기 혈통과 가문에/어울리는 자식을 낳겠지만/바르고 늘 정의를 지키는 집에서는/언제나 변함없이 훌륭한 자손을 얻게 될 운명이라고."
      4. v. [176-177pg 자비로운 여신들] 아테네: “나는 시민들에게 무질서나 포학한 전제 정치를 결코 환영하지 말도록 권하는 것이오. (…) 외경심을 간직하고 정도(正道)에서 벗어남을 두려워한다면, 향토의 수호와 국가의 안녕은 기필코 기대될 수 있을 것이오.”
    2. 분별없는 자
      1. ‘타자적 나’를 마주하지 않은 자
        1. '의식적 나'에 갇힌 자 --> 고집과 오만: 크레온, 오이디푸스
        2. 침전적 멜랑콜리를 겪는 자: 이오
      2. '타자적 나'에 갇힌 자 --> 광기: 복수의 여신들
    3. 분별하는 자
      1. [요약] 그리스 비극 속에서 인간은 운명을 이해하고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분별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이때의 운명을 나는 중간 보고서에서 “신적 당위의 표현과 이의 필연적인 실현”으로 이해한 바가 있는데, 인간은 ‘타자적 나’의 ‘의식적 나’ 앞에 표현됨을 마주하고 […] 실현시킴으로써 그리스 비극 속에서 인간이 가장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성취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2. ‘타자적 나’를 마주하기
        1. How?
          1. 극한 상황
          2. 예언
        2. 예시
          1. 프로이트의 멜랑콜리커
          2. 하이데거의 세인-자기
      3. 분별을 지켜 ‘의식적 나’로써 ‘타자적 나’의 노래를 현실에 실현시키기
        1. 아폴론이 디오니소스를 안고…
        2. 물론 이 과정에서 고뇌를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창조적 멜랑콜리는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다
      4. 결론
        1. ‘타자적 나’를 마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마주했다면 그에게 솔직한 삶을 사는 것, 다시 말해 어느 것도 숨기지 않고 나 자신에게 솔직한 삶을 사는 것에서 그리스 비극 속 인간이 가장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 나름대로 두 가지의 멜랑콜리에 대한 이해를 시도해봤다. 멜랑콜리가 드러나는 양상에 따라 나누어봤을 때 한 가지는 창조적 멜랑콜리이며 또 하나는 침전적 멜랑콜리이다. 창조적 멜랑콜리(해소가 아닌 승화가 가능한 멜랑콜리)는 인문학적 창조력과 서양 문화 속에서의 멜랑콜리의 모습과 가깝고, 침전적 멜랑콜리(자멸적, 자책적 멜랑콜리)는 의학적 의미로서의 우울증과 이것이 프로이트에 의해 확장된 인간의 보편적 모습으로서의 멜랑콜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모든 인간은 각자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을 가지고 태어난다.

디오니소스를 만나지 못한 채 이유 모를 슬픔에 휩싸인 사람이나, 디오니소스가 아폴론에 의해 억압된 채 아폴론만을 따르는 사람들[근데 무의식에 대한 의식의 억압도 내가 자각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말 그대로 ‘무의식’이므로—이 두 가지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은 모두 침전적 멜랑콜리의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가 ‘Mourning and Melancholia’에 서술했듯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을 겪은 사람은 그로 인해 자기 자신 속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의식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한편 (왜냐하면 애도 작업의 성패는 물론 사랑하는 대상의 동일화 등 이 모든 과정은 의식으로부터는 철저히 가려진 수준에서 진행되기 때문) 하이데거가 말하듯 상실 즉 죽음을 망각한 사람도—침전적 멜랑콜리의 일종으로서—원인 모를 실존적 불안을 겪어야 한다.

비극 작품이 제시하는 고통적인, 극단적인 한계 상황 속에서야 2. 주인공들 속 아폴론이 디오니소스에 빛을 비추고 (무의식이 의식적 수준으로 끌어올려짐, 마치 나르키소스가 뒤늦게 자기애의 저주를 깨닫게 된 것처럼; 아폴론이 디오니소스를 껴안고 디오니소스를 담아냄으로서 비로소 이유모를 슬픔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1. 일상성으로 단련된 의식적 나를 뿌리째 흔들고 디오니소스의 노래에 귀를 귀울이게 하는 결과를 제공,

[현대적 확장-더 알아보기]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 다시 이야기해보자면 비극 작품의 극단적인 한계 상황 속에서야 인간은 프로메테우스가 선물한 맹목적 일상적 희망으로부터 깨어나('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존재 속의 무, 죽음, 그리고 인생의 덧없음을 직시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비로소 실존적 양심의 부름에 귀를 귀울일 수 있을 것이라는 거다. 이러한 양심의 부름을 거절하지 않고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에 불려나감으로써 비로소 이유모를, 말 그대로 (존재의) 무에서 비롯된 불안을 딛고 본래적인 실존을 회복할 수 있다.

아폴론의 이야기에만 귀를 귀울인다면 침전적 멜랑콜리(현대/하이데거의 입장에서는 실존적 불안)에 잠기게 된다. 그렇다고 디오니소스의 노래에만 몸을 맡기면 악함만을 산출하는 광기, 자기 파멸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크레온과 클리타임네스트라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그려지는 수직선상에서 우리는 비극 인물들을 characterize할 수 있을 테고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그 둘의 정중앙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왜 모든 이야기들에서 ‘지나침이 없는 미덕; 탁월함’ 등이 강조되는지 잘 이해가 안 갔는데, 이렇게 이해해보면 될 거 같다: ‘코라’에서 오이디푸스가 승천한 것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음

<살면서 주어지는 고통 속에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지나침이 없는 중용을 지키며 살아가다 보면, 내가 이 세상에서 맡은 바는 무엇이고 나의 몫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질 것이다.>

MT: 운명을 신적 당위의 표현과 이의 필연적인 실현으로 이해할 수 있음
디오니소스를 만나는 것은 곧 디오니소스가 아폴론에게 표현되는 것이며, 아폴론이 디오니소스를 껴안고 디오니소스를 담아냄으로서 자기 자신을 신성화하는 것은 이의 실현이다 (표현이 어떻게 실현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지는가와 관련해서는 ‘광기’라는 개념을 통해 중간고사 대체 보고서에서 자세히 서술하엿다)
오이디푸스가 이야기 마지막에 테시레~라는 예언자처럼 눈이 먼 이유는 자기 속에 내재된 신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운명은 아폴론이 디오니소스를 껴안은 모습 속에서 나타난다/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조화 속에서 나타난다

저 밑 어두운 물 속에 하염없이 떠다니는 파피루스를 건져올려 밝게 빛나는 햇빛에 대고 적힌 것을 읽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이란 자신의 최대 잠재력을 모두 실현해낸 사람, 인간으로서 가장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실현해낸 사람을 가리켜서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