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Spring Semester - 'Great Books and Debate: Melancholy in Western Art'
저번 글에서 나는 “필연적 당위”의 “표현과 이의 필연적인 실현”으로서의 운명이 에로스적 광기를 통해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지를 설명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는, 운명을 마주함이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숭고함과 건강함을 가져오는지, 이때 이들이 느끼는 멜랑콜리란 정확히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를 밝혀나가고자 한다.
DISCLAIMER: 최소한 현상적으로만 살펴보았을 때 인간은 광기보다는 일상성과 관성이라는 허상에 매몰되는 경향성이 있는바, 지금까지의 두 편의 글은 모두 타자적 자아의 노래에 대한 responsiveness(대답할-수-있음)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에 대한 세 번째(마지막) 글에서는 이러한 편향성에서 벗어나 그리스 비극의 전반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데에 집중할 것이다. 그러므로 해당 글은 전체 그림의 반쪽을 비추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며 읽어주었으면 한다. (결국, 니체는 맞았다.)
우리는 하이몬과 이아손이라는 두 인물로부터 운명에 대한 무지 여부가 인생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관찰해볼 수 있다. 먼저 운명이 노래하는 필연적 당위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던 하이몬부터 살펴보자. 하이몬은 자신의 아버지 크레온이 안티고네의 행동을 법에 따라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처벌하려 하자 그에게 재고를 권유하며 법의 집행을 저지한다. 그때 하이몬은 자신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펼친다.
저는 어둠 속에서 불평하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귀한 행위 때문에 그렇게 부당하게도,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그 여자의 운명을 탄식하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니냐고. (소포클레스, 324)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일반 민중들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불평하는 소리들”로 묘사된 부분이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백성들은 하나같이 안티고네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의견을 내고 있는데 온 사람들의 통일된 의견은 곧 인간 보편의 도덕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이몬 자신도 어둠이 자신의 의식에 이러한 보편을 들려주고 있음을 인식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원리를 상기시킨다. 그에 의하면 디오니소스적 도취는 아폴론적 허상 밖에서 현실을 직시하며 느끼게 되는데, 이때 자아는 아폴론적 개별화의 원리 대신 온 인간, 온 자연과 함께하는 통일성과 긍정성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크레온 왕이 ‘왕’의 사회적 직책으로 인한 정치적 엄격성이라는 일종의 ‘허상’에 갇힌 채 앞으로 그를 강타하게 될 하마르티아적 고통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하이몬은 그 허상 바로 바깥에서 크레온에게 손을 내밀며 인간 보편의 디오니소스적 원리에 복귀함를 권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끝내 크레온은 자신의 허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하이몬과 안티고네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고,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야 비로소 그는 아폴론적 허상의 무의미함, 무능력함의 민낯을 깨닫고 절망한다.
이아손도 크레온 왕과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라고 해석해볼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유모와 선생과는 달리 이아손은 앞으로 자신의 가족에게 닥칠 하마르티아적 운명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메디아는 그동안 크레온 왕과 이아손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언질을 놓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뿌리치고 이미 크레온 왕의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된 이아손은 메디아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고집”이라 폄하하며 무시해버린다. (에우리피데스, 419) 결국 이아손의 첫 번째 방문 이후 아이게우스를 만나며 메디아는 자신의 계략을 세우고 실행함으로써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불행 속에 이아손을 몰아넣게 된다. 이러한 이아손의 “허상”은 그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함으로써 하마르티아를 막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조차 놓치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명에 대한 이 두 인물의 상이한 태도는 각각 어떠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먼저, 비극 작품 속 하이몬적 인물들은 아폴론적 허상 바깥에 서서 운명의 ‘표현’과 ‘실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최종적으로는 ‘창조적인 멜랑콜리’를 경험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운명이 보여주는 사실로서의 미래를 당위로, 운명이 들려주는 당위를 앞으로 다가올 사실로서의 미래로 인식함으로서 인물은 필연의 질서 속에서 그 자신을 위치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필연의 질서 속에서 하나의 역할을 분배 받은 자아에게 인생은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되며 살면서 겪게 되는 고통들도 필연 속에서 설명이 가능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들은 고통을 인내해 필연을 관철시킬 용기를 얻게 된다. 크레온 왕이 자신에게 “네[하이몬] 말은 다 그 계집애[안티고네]를 위한 것이”라며 소리칠 때 하이몬은 아버지의 분노를 감수하고 “그리고 아버지를, 저를, 또한 지하의 신들을 위한 것”이라며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소포클레스, 325) 하이몬은 디오니소스의 노래를 듣고 필연의 질서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고통을 용감하게 인내해나가는 인간이 되었다는 점을 이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서양 문화의 향기’와 ‘인문학적 향기’로서의 멜랑콜리 속에서 하이데거가 밝혀낸 문화 창작자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자유로운 창작은 그 전제로 “무거운 짐”으로부터의 해방, 나를 묶는 여러 가치들로부터의 풀려남을 요구하는데, 이 과정에서 창작자는 고뇌와 멜랑콜리를 겪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위대한 창작의 힘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하이몬적 인물들도 고통을 느끼는 존재들이기에 자신을 구속하는 아폴론적 허상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필연의 질서에 따를 때 수많은 고뇌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초연해지고자 노력한 자는 필연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최대 존재 가능성을 실현해 내고 자신만의 길을 창조해나감으로써 이러한 멜랑콜리를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아손적 인물들에게는 필연의 뜻이 무의식에만 깊게 잠겨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처럼 필연의 뜻을 마주하지 못한 자들은 의식의 언어에 매몰된 채 일상으로 강하게 단련된 허상에서 안정을 찾고자 한다. 이들에게는 세상이 자신에게 제시하는 고통의 대부분이 미처 설명되지 못하고 의문 속에만 남을 것이다. 여기서 이들은 ‘침전적 멜랑콜리’를 겪게 된다. 이때의 ‘침전적 멜랑콜리’란 나를 둘러싸는 세계에의 무지로부터 오는 자멸적, 자책적 우울로 수업 중 언급된 “몸의 향기”와 “사람의 향기”로서의 멜랑콜리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프로이트의 병적인 멜랑콜리 속에서 인간은 누구를 잃었는지는 알 수 있어도 그 자신 속에서 무엇을 잃었는지는 알지 못하는, 상실이 무의식 속에 잠겨 있는 상태를 겪게 된다. 만성적인 우울의 원인을 모른 채 개인은 자기애의 저주를 깨닫기 전 연못가에서 고통받던 나르키소스와 같이 이러한 멜랑콜리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주어진 문제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은 원인을 인지하고 있음에 있는데 원인을 모름은 문제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에 원인에의 무지는 인간에게 큰 고통과 절망을 가져다 준다고 볼 수 있다.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자는 곧 고통의 이유를 모르는 자이므로, 끝없는 침전적 멜랑콜리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작품 마지막에서 이아손의 한탄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아손적 인물들은 하이몬적 인물들의 대열에 영영 합류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이몬적 인물들이 그랬듯 이들도 늦게라도 자신의 하마르티아적 운명을 맞이함으로써 허상의 파편 위에 서 무서운 현실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무조건적으로 혐오하는 자가 아닌, 운명과 필연의 질서가 내게 명령하는 바를 통해 종국에는 고통을 “용서”하고 관심의 대상이 고통으로부터 필연의 질서를 실현해 내는 자신의 역할에 옮겨간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타자적 나’를 마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마주했다면 그에게 솔직한 삶을 사는 것, 다시 말해 어느 것도 숨기지 않고 나 자신에게 솔직한 삶을 살며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 비극 속에서 가장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