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Spring Semester - 'Great Books and Debate: Melancholy in Western Art'
‘운명’은 그리스 비극의 서사 전개에 있어 중심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극 작품들의 중요한 모티프를 이루고 있다. 특히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에서는 사건의 전개가 주로 이 개념을 전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두 작품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다뤄지고 있는 운명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에서 나타나는 운명의 양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두 이야기 모두에서 운명은 인간이 결코 달갑게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너머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근엄한 성질의 것으로 묘사된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의 죄악]이 이제 곧 드러날 것이고, 그[오이디푸스]는 그런 운명을 기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209)라며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종말을 예고하고, 이후 사건의 전모를 뒤늦게 깨닫게 된 오이디푸스는 “비통한 것 중에서도 비통한 것이 있다면/그것이야말로 오이디푸스의 운명이”(237)라 탄식한다. 한편, “복수하는 파괴자들인 하데스와 신들에게 복수하는 에리니에스 여신들이 이와 똑같은 재앙 속으로 당신을 잡아넣으려고 기다리고 있다”(소포클레스, 안티고네 335)는 크레온을 향한 테이레시아스의 질책이나 ‘아폴로’와 ‘제우스’와 같은 신들의 이름을 부르던 오이디푸스의 절규를 통해서는 운명이 신들의 뜻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당한 운명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리스 비극 속 운명이 신들이 인간에게 제시하는 일종의 수수께끼와도 같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이디푸스에게는 조사를 끝까지 진행해 진실을 마주할 것인지 진실을 덮어둔 채 자신과 국가의 안위를 좇을 것인지가 갈등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며, 안티고네는 자신이 인식하는 신법을 따를 것인지 국가의 실정법을 따를 것인지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와 같이 비극 속 등장인물들은 초현실적 질서 속에 존재하는 당위적 가치를 따를 것인지 개인과 국가의 이해관계와 같은 현실적 가치를 따를 것인지를 결정함으로써 신들의 물음에 답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어느 쪽이든 자신의 선택에 수반될 기회비용은 가공할 만한 것일 수밖에 없다. ‘운명’이라는 개념이 고려되고 있음은 일반적으로 어떤 한 인간의 현실적 지향과 당위적 지향 간의 괴리로 인해 이 둘이 상호배타적으로 존재하는 상황을 전제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에 비추어 본다면 신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곧 인간으로서 당연히 좇을 수밖에 없는 가치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반대로 인간적 가치들을 따르겠다는 것은 신적 질서를 부정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작품 속 서사의 전개는 신이 제시한 수수께끼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통제 바깥에 위치한 불가피한 필연의 질서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가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에 대해 강하게 질책한 후 이어진 코러스의 노래이다.
델포이의 바위에서 나온 신의 말씀이
피비린내 나는 손으로 형언치 못할
죄악을 저질렀다고 말씀하신 것은 누구냐.
질풍같이 빠른 말의 다리보다도 강하게
그를 도망가게 하라.
불붙은 번개로 무장한 제우스의 아드님은 달리어
저 무섭고 피할 길 없는
복수의 여신과 함께 그를 덮친다. (중략)
홀로 외로이 헤매는 그는
대지(大地)의 한복판 신전(神殿)에서
거룩한 소리를 피하려 한다.
그러나 그 소리는 영원히 그치지 않고
그의 둘레를 맴돈다. (소포클레스 209-210)
코러스의 이러한 노래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살인자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더불어 인간의 인생은 궁극적으로 신적 질서하에 위치해있으며 결코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세계관을 천명하고 있다. 즉, 아무리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당위를 거절하고 현실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신적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줄거리는 이후 코러스의 노래가 그대로 실현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의 사자로부터 폴리보스 왕과 그의 왕비 메로페가 자신의 양친이 아니라는 사실을 듣게 되고 이오카스테가 과거 자신에게 언급한 적이 있는 불길한 예언이 사실일 수 있겠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이는 옆에서 그와 사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오카스테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이에 대한 둘의 반응은 대립각을 세운다. 이오카스테는 사실 관계가 덮여진 채 남는 것이 “당신[오이디푸스]을 위해서 가장 좋은 길”(228)이라며 제발 그만해 달라고 오이디푸스에게 애원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그 가장 좋다는 것이 이젠 [자신을] 괴롭히고 있”(228)다며 진실을 밝혀내고 운명을 맞이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이후 이오카스테는 궁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며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코러스의 노래대로 인간의 선택이 실은 무의미한 것임을, 운명 속에서의 선택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 일체가 부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운명이 진정으로 인간에게 선택의 기회를 제시하고 있다면 우리는 운명 속에서 인간의 자유, 자기 결정 능력 등의 여지를 찾아볼 수 있어야 하는데 이들 작품 속 인물들은 어느 길을 선택하든 종국에는 모두 비극적 종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고 자살을 선택했을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는 현실을 선택함으로써 안정이 있는 일상으로의 귀환을 꾀했지만 이미 진실이 그녀의 정신 속에 자리를 잡은 이상⎯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그의 부인으로서 결혼 생활을 정상적으로 이어나가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그녀와 오이디푸스를 향해 몰려오는 신적 질서라는 세찬 물결에 몸을 맡겨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운명의 필연성은 안티고네의 말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파수병은 안티고네가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묻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녀를 크레온에게 데려오는데 이때 안티고네는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확고한 하늘의 법을 사람으로 태어난 몸이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임금님의 법령이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하늘의 법은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니라 불멸한 것이며, 그 시작은 아무도 모르지요. 인간의 어떤 생각도 두려워하지 않는 내가 신들 앞에서 인간의 법을 어긴 죄인일 수는 없어요. (…) 나같이 나날을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차라리 죽는 편이 이득이라고 어찌 생각하지 않겠어요? 나는 그런 운명을 당한 것이 조금도 괴롭지 않아요. 그보다 나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죽었는데도 장례도 치러 주지 못한 채로 버려 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슴 아픈 일이지요.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317)
현실에 몸담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안티고네에게는 목숨을 보전하고 일상적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진정한 정의는 무엇인가, 신들은 어떤 선택을 요구하는가를 알게 된 이상 그녀는 차마 이 당위적인 필연을 거절하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들의 뜻을 부정함으로써 복귀하게 될 현실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나날을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빠를 묻기로 능동적인 결정을 내린 사람은 안티고네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 상황을 “그런 운명을 당한 것”이라 묘사하며 자신의 의식 즉 자아를 수동적 지위에 재배치한 것도 이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당위와 현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뿐 아니라 인간은 종국에는 당위를 필연적으로 따르게 될 수밖에 없다는 점까지도 인간의 운명의 범위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리스 비극 속에서의 당위가 ‘현실’과 같이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괴리된 채 단지 또 하나의 선택지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유와 의지를 초월해 존재하는 절대적이고 타자적인 힘으로서 인간의 행위와 이후 사건의 전개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의 당위는 이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형태로 설명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세계를 관장하는 전지전능한 신들의 뜻이었으며, 심리학적 관점에서 이를 재해석한다면 인간의 무의식, 윤리학적 인식론의 관점에서는 이를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닌 도덕적 직관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 속 이러한 운명의 ‘타자적 힘’이 정확히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운명 즉 신의 뜻의 발현이 어떻게 인간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인지,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 운명이 어떻게 다가오는 것인지 두 작품을 통해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앞서 규명한 운명의 성격을 통해 우리는 운명이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는 독립된 초현실적 필연과 관련되어 있으며 의식과 대비되는 타자적 힘으로써 인간의 행위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타자적 힘에 휩싸인 사람은 현실의 입장, 특히 의식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무분별한 고집 또는 광기로 이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의심이 사실임을 확인하게 된 이후 오이디푸스가 보인 반응을 두고 사자는 “인간 이외의 무슨 힘에 이끌”(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234)린 것과 같았다고 묘사하며, 눈을 다친 오이디푸스의 처참한 모습을 목격하고 코러스는 “이 무슨 광증이 당신을 덮쳤”냐, “그 무슨 운명의 마귀가 (…) 몰아친 탓”이냐며 탄식한다 (235). 이스메네는 언니 안티고네의 완강한 고집에 대해 “그 무서운 일[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묻는 일] 때문에 언니의 가슴은 불타고 있어요”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306)라 언급하며, 동굴 감옥 속에서 크레온은 “아, 불행한 녀석아, (…) 어떤 마귀가 제정신을 잃게 했단 말이냐” (339)라며 아들 하이몬을 애타게 부른다. 반면, 신의 질서에 몸을 내맡기는 장본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타자적 힘은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이끌림 즉 사랑의 감정과 유사하게 인식된다. 앞서 살펴보았듯 운명을 거부하고 현실을 택하는 방안을 두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 안티고네는 “나날을 괴로움 속에서” 보내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한 데에서 운명에 대한 이들의 이끌림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가슴 속에 격동하는 정열은 그 어떠한 기회비용⎯오이디푸스에게는 그가 누리던 정치적 권력, 안티고네에게는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면 누렸을 일상적 안정⎯과 고통⎯오이디푸스에게는 진실이 가져온 정신적 고통과 눈을 찌를 때 느꼈을 육체적 고통 등⎯이 수반되더라도 인물이 신적 옳음을 관철시키도록 유도함으로써 필연적 당위를 실현시키고 신이 상실된 현실의 재신성화 작업을 성공시킨다. 사랑이 광기의 한 형태임은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는 주장이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디오티마는 사랑을 “단일 형상인, 신적인 아름다운 것 자체”(211e)에 대한 직관을 통해 “절제와 정의” (209a) 등의 “참된 덕을 산출하고 키[움]”(212a)으로써 “불사를 욕망”(207a)하는 것으로 정의하는데, ‘파이드로스’에서 플라톤은 이러한 사랑의 모습을 두고 ‘광기’의 일종이라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이곳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면서 참된 아름다움을 상기한다면 날개가 돋고, 날개가 돋으면 솟구쳐 날고 싶은 바람을 갖지만 능력이 없는 탓에 새처럼 위를 바라보면서 아래 있는 것들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을 듣는 걸세. (…) 그런 광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불리지. 왜냐하면, (…) 사람의 모든 영혼은 본성적으로 있는 것들을 이미 바라보았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기 이 생명체[인간]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네. (249d-250a)
결국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작품 속에서 보이는 굳은 의지⎯‘고집’이라고 명명하기에는 이 단어가 지닌 어감이 다소 부정적이라면⎯는, 저 “위”의 진정으로 아름다운 신적 질서에 매료됨으로써 그들이 육체적 고통과 개인 및 국가의 안정이라는 “아래에 있는 것들”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이루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에 제시된 운명을 신적 당위의 표현과 이의 필연적인 실현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운명관 속에서는 인간의 자유가 존재할 여지를 아예 발견할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이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남을 수 있는 가능성에는 운명에 대해서 무지한 채 살아가는 것과 운명을 알고도 이를 거부하고 현실을 선택하는 것 총 두 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와 같이 예언자로부터 예언을 듣고 나서야 신의 뜻을 알게 되는 등의 외재적 요인 또는 안티고네처럼 처음부터 진정으로 옳은 일이 무엇인가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등의 내재적 요인이 주어지지 않은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현실의 보호에 철저히 감싸진 채로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을 깨닫고도 의식적으로 타자적 힘을 거부하는 자의 삶에서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자유를 발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자유들이 진정으로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선택한 수동적 인간상은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나르키소스 신화의 두 대표적인 판본을 비교해볼 수 있다. 그리스의 문헌학자 코논이 기록한 나르키소스 신화에서는 나르키소스에게 사랑을 매몰차게 거절당한 아메이니아스가 나르키소스가 보낸 칼로 자결을 하면서 신에게 복수를 기도한다. 이후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 나르키소스는 이를 아메이니아스의 죽음에 대해 신으로부터 받게 된 정당한 대가임을 깨닫고 연못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둔다 (Conon 101-102). 한편 로마 제국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나르키소스 신화에서는 에코라는 요정이 숲에서 나르키소스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구애를 거절당한 에코가 그를 너무나도 그리워한 나머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이를 지켜본 복수의 신 네메시스가 나르키소스에게 자기애의 저주를 건다고 한다. 이후 나르키소스는 연못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코논의 판본에서와는 달리 마지막 순간까지도 신의 뜻을 알지 못한 채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만을 애타게 부르며 죽음을 맞이한다 (Ovid 67-73). 이처럼 두 판본 모두에서 나르키소스가 자신을 연모하던 사람들에게 취한 태도가 당시 그리스인들이 보편적으로 인식하던 신적인 옳음에는 위배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두 나르키소스가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임을 깨닫고 난 직후의 반응은 현격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코논의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과거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 신적 질서의 상실을 운명의 깨달음과 수긍을 통해 해소하고자 한 반면, 오비디우스의 나르키소스는 운명에 대한 무지와 함께 자신의 반영(反影)을 향한 사랑이라는 현실적 가치 속에 갇힌 채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 우리는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로부터 관찰할 수 있는 일련의 탈상식적 행위들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볼 수 있다.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 이 두 명의 주인공은 실은 자신에게 드러난 운명 또는 필연적 당위에의 영원한 복종을 맹세함으로써 신이 상실된 현실 상황으로부터의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직시하고 이에 기꺼이 몸을 맡김은 이들이 과거 외부적 요인*—오이디푸스 자신이 부모를 알아보지 못한 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사건, 크레온이 폴리네이케스의 시체 매장을 금지한 사건—으로 잃게 된 신들을 자신의 운명에서 재발견함으로써 상실을 온전히 치유할 수 있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코논의 나르키소스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 운명에의 수동적 태도는 일정 부분 인간적 자유의 희생을 수반했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정신적 자유의 실현에 기여했음을 시사한다.
주석
외부적 요인* ‘외부적’이란 어떤 요인이 한 사람의 의식적 선택 밖에서 기인했음을 의미한다. 오이디푸스 자신이 직접 행한 일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재적 요인’이라 할 수 있는 까닭은 사건이 발생할 당시에는 그가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부모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그리스 비극, 곽복록 조우현 역, 동서문화사, 2007.
플라톤. 파이드로스, 조대호 역, 1판 1쇄, 문예출판사, 2008.
---. 향연, 강철웅 역, 1판 2쇄, 이제이북스, 2011.
Conon. “NARCISSUS.” The Book of Greek and Roman Folktales, Legends, and Myths, William Hansen 역,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9.
Ovid. “The Story of Echo and Narcissus.” Metamorphoses: The New, Annotated Edition, Rolfe Humphries 역, Indiana University Press, 2018.
Smith, William.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vol. 1 and 3, University of Michigan Library, 2005.